자연과 기술에 대한 인본주의적 상상력

 

여기 거대한 프로젝트가 있다. 수억 년에 걸친 지층의 이동으로 갈라진 아프리카의 두 호수를 연결하려는 계획이다. 350Km에 이르는 두 호수 사이에 지하수로를 파고 수로의 끝에 부표와 같은 기계적 장치를 설치하는 것이 프로젝트가 목적한 바이다. 이 프로젝트는 동판에 옮겨진 작가의 아이디어 스케치에서 혹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물을 파동을 상징화한 조형물 그리고 실제 크기의 부표를 제작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물론 이 프로젝트는 현실성이 없다. 이 비현실성이 발을 딛고 있는 지평이 바로 예술이다. 실용성, 합리적 목적성이 배제된 프로젝트는 외견상은 마치 리비아의 대수로 공사와 같은 거대한 규모를 지녔다. 그러나 박기진의 예술은 이러한 거대함에 엉뚱한 목적을 조합함으로서 토목공학을 삼천포로 빠지게 만든다.  

 

작가는 과거 한 종을 이루었던 물고기가 나누어진 생태계에서 따로 진화하여 이제 서로 다른 모습이 되어버렸다고 판단하고, 이들을 만나게 해주려는 의도를 실천하였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작가의 아프리카 여행에서 얻어진 경험에서부터였다. 작가의 여행경험은 주로 자연사적 관심으로 이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전 작업에서도 이러한 맥락은 꾸준하게 지속되어 왔다. 작가의 관심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생태학이나 생물학이 아니라, 자연이 형성한 메커니즘에 더 접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새의 날개 짓을 연구하여 인간의 비행을 위한 메커니즘을 구상해냈던 것처럼, 박기진도 물고기의 유영을 연구하여 그 골격과 운동을 기계적인 방식으로 재현한 적이 있다. 작가가 갖는 기계적 메커니즘에 대한 관심은 어릴 적의 기억으로 소급된다. 여러 가지 주변의 사물에서 작가는 수없이 다양한 메커니즘의 작동원리와 그 현상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여주었고, 현재의 작업에서도 이러한 관심과 그것으로 결정화된 조형의지는 여지없이 핵심적인 계기가 된다.  

 

18세기말 시작된 산업혁명은 단순히 산업과 과학의 발전이라는 거대 개념 속에서만 이해되어질 것은 아니다. 이 혁명은 공간과 시간과의 오래된 관계 항을 해체하고 다시 설정하게 만들어주었으며, 진보에 대한 인간의 역사의식을 한층 고취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문학에서는 SF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고, 다른 예술에서도 산업혁명의 여파는 강력하였다. 이후 이 혁명은 앨빈 토플러와 스티브 잡스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관계된 새로운 패러다임을 불러일으켰던 의식과 사유의 거대한 너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너울은 발전과 개량의 이름으로 합리화된 현실에만 효력을 발생했던 것은 아니다. 이 너울은 다른 파동을 함께 가져왔다. 즉 상상력 혹은 새로운 예술정신이었다. 산업혁명의 전파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미래주의를 불러냈고, 이외에 다양한 예술적 현상과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필자에게 가장 생생한 산업혁명의 면목은 바로 메커니즘이 갖는 미학과 역사적 회고다. 다빈치를 떠올린 것이 바로 그 예증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 가지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천공의 성 라퓨타>등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상상력이다. 하야오의 만화영화의 특징이라면 바로 19세기 증기기관으로 표상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추억과 그 추억이 이루는 조작된 미래상이다. 현재로서는 초보적일 수밖에 없는 기계들을 가지고 하야오의 상상력은 하늘을 나르고 거대한 도시를 세운다. 하지만 그러한 과학적 환경 속에서 인간은 더욱 인간적으로 나타나고, 이를 관리할 인간의 도덕과 심성이 강조된다. 즉 예술은 과학이라는 명목으로 얻을 모든 현실적 이익에 대비되는 다른 목적을 추구한다. 그런 점에서 박기진의 프로젝트는 다른 파동의 너울을 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박기진의 메커니즘 혹은 사이비 과학(=예술)은 자연과 인간과의 함수관계처럼 그 사이에 변수를 작동시키는 보이지 않는 의식적 메커니즘의 결과이며, 이를 보여줌으로서 예술을 완성하는 편이다. 즉 자연과 인간의 접점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그가 꼼꼼하게 작성한 노트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작가는 일종의 SF소설을 쓴다. 앞에서 언급한 아프리카의 두 호수도 사실(fact)에 근거하긴 했지만, 이후의 전개는 그의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적 결과물이다. 이 허구에는 나름의 미학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하야오의 것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필자에게는 오히려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Myst>라는 롤플레잉 게임이 배경으로 설정한 독특한 문명세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거대한 톱니나 금속의 관 그리고 초역사적인 건축모티브들과 메커니즘이 결합된, 하지만 이면에는 매우 신비감이 감도는 미래종교적인 분위기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 신비감을 위해 작가는 공간을 요구한다. 물론 작품들의 물리적인 현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 공간이지만, 박기진에게 공간은 특별한 쓰임새로서 제공되었다. 그에게 공간은 일종의 시물레이션의 장소이다.   

 

그래서 공간은 프로젝트를 위한 생생한 압축적 공간이 된다. 우선 그가 조각을 배웠고 조각가로서 여전히 그 예술적 위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간은 긴요할 것이라는 막연한 개념에서 나아가 공간은 그의 실천이 전개될 일종의 프로세스 로드가 된다. 물론 철학적이거나 존재론적 공간에 대해서도 언급의 여지는 있지만, 무엇보다 이 프로젝트에서 공간은 물리적인 장소에 대한 압축과 상징으로 작용한다. 나누어진 공간의 한 편에서 수로의 시작이 되는 수심 깊은 우물을 설치작업으로 형성하고서 다른 공간에 부표를 설치하고 그 공간들을 잇는 통로에 프로젝트를 설명하거나 또는 프로젝트를 위한 이야기들을 보여줌으로서 공간은 집약된 의식과 더불어 공간의 압축을 보여준다. 상상력이란 현실에 비유하여 항상1:1의 관계를 벗어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박기진의 비율조정은 마치 기계설계도의 도면처럼 축약하고 생략하는 식으로 나타난다. 박기진이 설치작업으로 보여주는 것은 인공적인, 즉 인간의 의지와 이성이 결합하여 형성한 사물들이지만, 그것이 목적하는 지향점은 바로 자연이다. 하지만 과학이나 산업이 설정하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자연의 역사와 속성을 복구하려는 것이 바로 목적이 되고 있다. 

 

끝으로, 관객들은 그 목적의 층위에 단순히 자연의 복구나 생태적 환원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비전 따위들이 그 사이 사이에 쌓여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거대한 부표가 실제로 보여주는 외형과 들려주는 규칙적인 기계음으로 인해 인간의 감수성이 수용할 수 있는 스케일을 약간 넘어서면서 엄습하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외로운 존재가 머나먼 거리를 헤엄쳐 온 물고기들이 잠시나마 해우하는 터미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왠지 모를 사유의 온기가 주위에 감도는 것은 그가 지닌 독특한 인본주의의 발산이라고 하겠다.  

 

김정락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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