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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원석(공간화랑 큐레이터)

장소의 기억


장소’는 매우 구체적인 것이면서도 매우 추상적인 소재다. 일상의 대화 속에 거론되는 현실의 장소는 특정한 목적을 지시하는 어떤 것으로서 지극히 물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현재’라는 시점의 맥락에서 존재하는 물적 단서다. 반면 그 지시의 속성을 벗어버린 장소는 물질의 영역을 초월하여 정서가 결합된 비물질의 영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우리의 기억과 사고 속에서의 장소는 특정한 시간과 정서가 결합된 사고의 단서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인식의 영역 속에 깊이 침잠한 장소는 정체성의 상실과 의식의 분절을 막아준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영혼의 무게가 담긴 깊은 신념과, 그것이 지시하는 삶의 방향성이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지는 비단 전장의 참혹성을 목도한 사람들의 기억이 반전의 행동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소를 기억하고 장소를 사유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으로 수행할 수 있는 실존적 사유이며, 망각의 늪을 벗어나는 예술의 본질이기도 한 것이다.

이번 <장소의 기억>전은 ‘장소’라는 대상을 사유하고 성찰하는 7명의 작가들의 작업 세계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각자 장소를 바라보는 나름대로의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예술적 해석의 결과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 구현모 김승영 진은수, 장소의 기억_02, 창고 Warehouse,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1

먼저 3층 전시장을 가득 채우는 것은 구현모, 김승영, 진은수가 공동작업한 설치작품이다. 시안미술관이 과거 초등학교의 교사(校舍)였다는 기억은 비단 미술관의 소개자료나 건물의 외관과 같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에서만 유추할 수 있는 것만 것 아니다. 그들은 미술관 뒷뜰 한켠에 오랜 기간 존재해왔던 낡고 작은 창고에 주목했다. 아무리 낡고 허름한 것이라도 학교의 재산으로 여겨져 잘 보관되던 과거 학교의 분위기를 회상할 때, 이 조악한 창고가 축조되고 존재해 온 그 시간 동안 수많은 기억과 흔적들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작가들은 이제 용도를 상실한 이 창고를 시안미술관 3층 전시장으로 옮겨놓는 프로젝트를 감행했다. 이 경성(傾性)의 대상을 십여미터 이동시키기 위해 동원된 비용과 노력을 감안해보면 예술이 경제적 효율성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진 것인지를 실감하게 해 준다. 그러나 이것은 산술적 계산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의미를 갖는다. 이들이 시도한 것은 현상을 지시하는 장소의 물리적인 존재성을 사유와 사고의 영역 속에 존재하는 정서적 존재성으로 변환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사물에 예술가의 시도를 덧입힘으로써 거대한 맥락과 의미를 창출시키는 예술 행위의 본질을 상기하게 만드는 작품인 것이다.

1층 전시장 입구에는 박홍순의 사진 작업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오랜 시간 자신이 거주해 온 지역 인근에 존재하고 있는 서울의 ‘한강’이라는 장소에 대한 실존적 체험과 그 기억의 편린들이다. 지금은 그 모습마저 상실하여 너무나 낯선 모습으로 변모해버린 한강변의 풍경은 ‘어디에나 있지만 보이지 않는, 우리들의 풍경’(평론가 강수미)인 것이다. 아울러 도심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모텔의 이국적 풍경들을 잡아 낸 ‘꿈의 궁전’ 연작은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담아낸 지극히 현실적인 장소의 언캐니한 모습을 주목한 작가적 시선의 결과물이다.

▲ 임승천, 장소의 기억_04, 유랑 Wandering,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1

1층 전시장 중앙에는 임승천의 설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임승천은 가상의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그 이야기 구조를 기반으로 평면부터 공간 설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그가 제시하는 이야기의 서막은 대규모의 토지 개발공사 등으로 인한 집단이주와 같은 사건에서 비롯된다. 장소의 상실이 주는 절박함이 원인이 되어 집단 이주를 떠나는 사람들과 그 이주의 과정에서 태어난 주인공, 그리고 그 주인공이 유랑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세계들의 모습으로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들은 현실의 장소 혹은 가상의 장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전시장에 놓여져 있는 숨쉬는 물고기는 그의 스토리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날개를 먹어버린 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져 버린 존재다. 머리를 망실한 채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어두운 실내 공간의 한 쪽에 박혀서 가뿐 호흡을 유지하는 그 물고기에게는 그 장소가 도피와 회한의 공간인 것이다.

▲ 장소의 기억_05, 1층 입구 view 이미지

1층 전시장의 안쪽으로는 박형근의 사진 작업이 전시되고 있다. 그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뿜는 장소의 분위기를 사진으로 표현함으로써 이성과 감성이 교차하는 묘한 지점을 잡아내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작업은 불편하면서도 익숙하고, 목가적이면서도 기묘하며, 불안하면서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몽환적 풍경의 성질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대상의 본성을 드러내기 위해 대상이 되는 장소에 연출을 가미하거나 색감을 보정하는 등 약간의 제어행위를 시도했었다. 그렇게 완성된 새로운 장소의 분위기는 지극히 서정적인 형식미를 갖추면서도 잠자던 내면의 감각들을 일깨우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 박기진, 장소의 기억_03, 발견 Discovering,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1

마지막으로 1층 별관에 선보이는 박기진의 작품은 물이라는 대상을 하나의 거대한 장소로 인식한 작가의 해석의 결과물이다. 바다라는 거대한 존재를 배경으로 한 물의 영속적 순환구조로부터 분리된 물들이 최후를 맞이하는 곳이 호수라는 것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아프리카의 두 개의 호수, 말라위(Malawi)와 탕기티카(Tanganyika)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오래 전 원래 하나의 해연(海淵)이었다가 지각 변동으로 판이 움직였을 때 각각 갈라져 나가며 서로 떨어진 곳에 갇히게 된 것이 이들의 운명이다. 박기진은 자신의 사유를 기반으로 두 개의 호수를 이어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연결의 한 갈래는 양 호수의 바닥을 각각 터널로 연결하여 물과 물을 만나게 하는 것이다. 전시장에 수직적으로 올라와있는 작품은 그 호수의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터널의 진입부를 형상화한 설치물이다. 계단을 통해 터널의 입구로 올라가는 관객들은 영상을 통해 재현된 호수의 이미지를 통해 실제로 경험하진 않았지만 존재를 확신하는 모종의 장소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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